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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제의 인물

효자 김득인

“살아 계실 때도 예로서 섬기고, 장례도 예로서 치르고, 제사도 예로서 모시라.”
첫 번째 인물은 효자 김득인이다. 그는 조선 세조~중종(1455~1544)때 인물로, 청도 김씨 고부파 15대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동래현에 따르면, 김득인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황령산 자락에 여막을 짓고 3년간 예를 다해 모시며 그 곁을 지켰다. 부친의 부재로 가세가 기울어 가난했으나 자신은 굶으면서도 어머니의 끼니가 끊어지지 않도록 극진히 봉양하였다. 얼마 후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그는 황령산 아래쪽 골짜기 해가 잘 드는 곳에 어머니를 모시고 마치 살아계신 듯이 3년 동안 아침저녁으로 식사를 올리며 공양하였다. 어머니 상을 마치자 김득인은 아버지의 유해를 모셔와 어머니 묘 앞으로 이장하여 다시 3년간 여막살이를 하였다. 3년간 치르는 것도 쉽지 않았을 터인데, 약 10년 동안 부모상을 치르는 것은 당시로서도 굉장히 드문 경우였을 것이다. 한번은 흉년이 들어 왜구들이 황령산 일대로 노략질을 왔다가 움막을 지키는 김 씨를 만났다. 훔칠 물건은커녕 풀칠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부모 곁을 지키는 그의 모습을 보고, 왜구들은 그 효심에 감탄하여 나중에는 미역을 뜯다가 주기도 하고, 혹은 쌀과 향을 갖다 주기도 하며 존경심을 표했다고 한다. 성종 3년(1472년)에 조정에 이 소식이 보고되어 김득인에게 종사랑으로 풍저창의 부봉사라는 직첩과 포상이 내려졌다. 조선 초 김득인은 유교적 장례문화에 따라, 부모의 초분 옆에 오두막을 짓고 3년간 금기생활로 공양했던 것인데, 당시로서는 사회적 모범사례가 될 만한 것이었다.

항일운동가 문시환

문시환(1897~1973)은 문정두의 아들로, 1897년 8월 12일 경남 동래군 남면 밤대(현.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에서 태어났다. 1남5녀 중 외아들로 부모의 각별한 사랑 속에 자랐다. 1912년 공립동래보통학교(현. 내성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사립동명학교(현.동래고등학교)에 진학한 문시환은 학교 선생님이었던 김병규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당시 일본은 우리나라를 근대화한다는 명분으로 갖가지 이권을 뺏어갔고 이에 민족적 의분을 느낀 문시환은 동명학교 3학년(19세)때 가출하여 만주를 거쳐 상해로 건너갔다. 그는 독립운동 지사들을 돕는 활동을 하다가 1919년 3?1운동 이후 귀국하였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외아들의 가출에 충격을 받고 쓰러져 끝내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귀국 후 문시환은 백산 안희제를 중심으로 설립된 기미육영회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1920년 4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정칙학원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수료하고 미국 유학 계획을 품고 1922년 조선으로 돌어왔다가 동아일보사 부산지국의 기자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1923년 1월부터 5월까지 중국 상해임시정부가 소집한 국민대표회의에 경남기성회 대표로 참가하여 국민대표회의에서 안창호 계열의 개조파 간부로 활동하였고, 국민대표회의 후 보천교청년회 대표 강홍렬 등 개조파 지지자들과 함께 김원봉의 의열단에 입단하였다. 의열단은 1923년 12월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은행, 종로경찰서 등의 파괴와 조선 총독 및 일본천황 암살 등의 임무를 수행할 단원 11명을 선발하여 조선과 일본에 파견하기로 했다. 의열단 제3차 암살?파괴 계획으로 불린 이 계획을 대대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군자금 모집을 결의했다. 이에 문시환은 군자금 모집요원으로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검거되었다. 그는 1923년 12월 29일 서울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었으며 1924년 2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제령 제7조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지독한 고문과 탄압으로 갖은 고초를 겪고 출옥한 그는 출감 이후에도 일제의 요시찰 대상자로 선정되어 해발될 때까지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

출옥 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직물상을 경영하기도 했고, 이후 동래군 생활필수품상업조합 이사장, 부산직물소매상업조합 이사 등을 지냈다. 1945년 해방 이후 미군정 아래에서 동래군수와 경남도훈국장 및 상공국장 등을 지냈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의원직을 사임하고 경상남도지사에 임명되었다. 도지사로 재임하던 1949년 3월 경상남도 임시비상사태 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여순사건 작전 비용, 상해군경 및 이재민 구호금을 조달하기 위한 회의를 개최해 금 1만원을 내는 등 솔선수범하다가 1949년 11월 14일 퇴임했다.

여러 방면으로 사회활동을 계속하던 그는 1973년 11월 11일 7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자녀들은 아버지 장례식에 대한 허례와 낭비를 생략하고 20만원을 인재 양성에 써달라며 원불교 육영부에 장학금으로 기탁하기도 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인정해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의 묘소는 경상남도 양산시 법기로 106번지에 있다.

항일학생운동가 이도윤

이도윤(1923~2013)은 경남 양산군 기장면 출생으로 1969~78년 연제구 거제동에 거주하였다. 그는 1940년 동래중학교 5학년(18세) 재학 당시 11월 23일 시행된 군사대연습 중 일본장교 노다이의 차별대우에 항거하다가 1여 년간 옥고를 치른 항일학생 중의 한 사람이었다. 부산항일학생운동(소위 노다이 사건)은 1940년대 일제가 태평양전쟁으로 군국주의 야욕을 드러내던 시기에 일제가 우리나라 학생들에게 군사교육을 시키는 과정에서 일어난 부산 경남 학생운동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병참기지화하여 중국 대륙을 점령하려는 야욕으로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을 도발하고 1941년에는 소위 아시아 대공영권이라는 이름으로 아시아 대륙에서 서구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미국기지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일제는 1938년부터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하고자 국가총동원령을 발동하고 학생들을 유사시에 전쟁터로 끌고 가기 위한 준군사훈련을 강요하고 있었다.

「동래구지」 일제하 학생운동편을 보면, 1940년 11월 21일, 22일 양일간 일본군 노다이(육군대좌, 부산병참기지사령관, 일본인 학교인 부산중학교의 배속장교 겸임)의 총지휘로 경남학도연합 군사대연습이 있었다. 부산 경남의 중등학생들을 경기관총과 38식 소총으로 무장시켜 ‘동군-부산제2상업학교(현.개성고등학교, 한국인학교, 이하 한), 부산중학교(일본인학교, 이하 일), 부산제1상업학교(일)’과 ‘서군-동래중학교(한), 마산중학교(일), 진주농업학교(한), 진주중학교(한)’으로 나눠 21일, 22일 양일간 모의 전투훈련을 실시하였다. 동군은 구포역에서 김해 방면으로, 서군은 진영역에서 김해 방면으로 진격하는 방식이었는데, 훈련 중 여러모로 차별대우를 받던 우리나라 학생들은 나라를 뺏긴 설움과 더불어 민족차별에 대한 분노가 들끓어 올랐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 학생들은 산악에 배치하여 훈련을 시킴으로써 많은 체력을 소모하게 만드는 식이었다. 이는 다음날 전개될 국방경기대회 본선에서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게 하기 위한 계략이었다.

이틀간의 훈련 후, 11월 23일 부산 공설운동장(현. 구덕운동장)에서 제2회 경남학도 전력증 강 국방경기대회가 개최되면서 차별은 더욱 심해졌다. 대회 전통에 따르면, 경기장 입장 시 전년도 우승학교가 우승기를 앞세워 맨 먼저 입장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노다이는 전년도 우 승학교인 동래중학교를 앞세우지 않고 일본인 학교인 부산중학교를 앞세워 입장시켰다. 학생 들의 분노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경기가 시작되자 노다이 대좌의 차별은 더욱 커졌다. 비 상소급 경기에서 부산제2상업학교 선수인 최진열, 김상돈이 부산중학교 선수보다 1초 앞섰는 데 반칙을 선언하여 2초를 깎아서 부산중학교 선수가 1초를 앞서게 점수를 주었다. 담가경기 (들것에 환자를 싣고 빨리 달리기)때 동래중학이 1위를 하자 태도불량, 복장불량 등을 꼬투리 를 잡아 재시합을 시키려 하자 부산제2상업학교 교장과 교사가 이를 항의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고 억지로 재시합을 시키는 등 부당한 심판을 일삼았다. 특히 20명이 완전 무장하여 400m 운동장 트랙을 5바퀴 도는 무장행군은 참가 종목 중 가장 점수가 많은 20점 만점으로 이 경 기의 여하에 따라 1위가 결정되는 경기 종목이었다. 예비경기에서 가장 성적이 우수했고, 전 년도 1등인 부산제2공립상업학교(현,개성고)는 코스 선택 추첨에서 배제시키고 가장 불리한 6 라인에 배정하였다. 1코스는 정해진 코스만 달리고 제2코스부터는 오픈코스로 달리는데 2코스 에서 부산제2상업학교가 부산중학교를 제치고 1위로 나가자 반칙을 했다는 경고와 함께 5개 팀을 다 보내고 뛰게 하여 6위가 되도록 하였다.

이렇게 부당한 심판 판정에도 불구하고 동래중학교가 총점에서 0.5점 앞서서 1등을 하였으나 순위를 바꾸어 일본인 학교인 부산중학교가 1위, 동래중학교와 부산제2상업학교가 각각2,3위 를 하게 되었다. 일본인 학생들에게 지지 않겠다는 불을 뿜는 민족자존, 민족긍지의 투지로서 경쟁하였으나 일방적인 편파 판정으로 한국인 학생들이 패하게 되자 한국인 학생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오후5시경, 우리 학생들의 울분과 의분 속에 폐회식이 진행되었다. 우리 학생들은 폐회식 참 가를 거부하였으나 학교 측의 강경한 요청으로 부득이 참여하였다. 심판장인 노다이가 성적을 발표하고 부산중학이 우승했음을 발표하자 운동장 분위기는 박수 하나없이 비난 섞인 함성만 오갔다. 일본 국가가 제창되었지만 전혀 따라 부르지 않은 양교 학생들의 울분은 더욱 끓어올 랐다. 학생들이 항의하자 노다이는 “심판판정은 신성하고 절대 불가침이므로 따르라”고 강요 했다. 이에 분노한 우리 학생들은 폐회식의 마지막 식순인 일본국기 하강식 때 일본국가 대신 우리의 애국가와 아리랑을 불렀고, ‘노다이 죽어라!’, ‘왜놈 죽어라!’고 하는 절규와 고함은 어 두침침한 황혼 속에 더욱 고조되어 갔다. 마침내 한국 학생들은 나라 잃은 설움과 차별, 일본 에 대한 의분을 참지 못하고 일본인을 향한 함성과 투석 등을 시작으로 일대는 아수라장이 되 어 항일의 전쟁터가 되어 버렸다.

놀란 일본인 학생들은 공포에 떨었으며 일본 경찰과 헌병은 그 기세에 놀라 뿔뿔히 흩어져 도망쳐버렸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눈치챈 노다이 대좌도 뒷문으로 도망을 갔다. 오후6시경, 의분에 불타던 한국인 두 학교 학생 1,000여 명은 누가 뭐랄 것도 없이 부산 공 설운동장 입구에서 8열 종대로 모여섰다. 악대를 앞세우고 당시 금지곡이었던 ‘황성옛터’‘아리 랑’‘양산도’‘도라지 타령’‘쾌지나 칭칭’ 등 우리 민요를 합창하면서, ‘조선독립만세!’‘일본놈 죽 여라!’‘무엇이 내선일체냐!’‘무엇이 동아의 맹주냐!’‘너희들은 일본으로 돌아가라!’라고 외치며 구덕운동장을 벗어나 부산역이 있는 시내 방향으로 가두행진을 하며 시위하기 시작했다. 교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4열종대로 스크럼을 짜고 대신동에서 보수동으로 향했 다. 보수천 검정다리에서 동래중학교 학생들은 광복동을 거쳐 당시 중앙동에 자리하고 있던 부산역으로, 부산제2상업학교 학생들은 대청동을 거쳐 부평동, 중앙동에 이르기까지 시내가 떠나가라고 구호를 외치며 걸었다. 천지가 무너지는 듯 위치는 젊은이들의 구호소리가 시가를 진동시켰다. 겁이 난 일본인들은 그들이 운영하던 상가의 문을 닫았다. 조선의 피가 끓고 있 던 우리네 기와집과 초가들은 불을 밝히고 거리를 지나가는 자식들을 향해 눈시울을 적시며 박수를 보냈다. 정의와 민족정신을 보여주는 부산청년들의 위대한 절규였다.

오후7시경, 저학년을 귀가시킨 4,5학년 400여 명은 중앙동 부산역 인근에서 재집결하였다. 노다이 관사(현.부산터널 인근)를 습격하기로 한 그들은 행진하며 노다이 관사에 도착했다. 학 생들은 외등의 불빛에 문패를 확인하고 ‘노다이 나와라!’‘노다이 죽어라!’ 등을 외쳤으나 아무 응답이 없자 일부 학생은 돌을 던져 외등을 깨버리고, 또 십수 명은 대문을 열고 집안에 진입 하여 노다이를 찾았으나 그는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그의 처는 겁을 먹고 벽장에 숨어 있었다. 그의 처에게 노다이의 소재를 다그쳤지만 알 수 없었다. 분노한 학생들이 던진 돌에 노다이 관사의 유리창은 순식간에 하나 없이 박살났고 지붕과 건물 등이 흉하게 변해 버렸다. 보안등이 깨진 노다이 집은 순식간에 폐허로 변했다.

노다이 대좌가 없는 것을 확인한 학생들은 다시 대열을 정리하여 부산역으로 되돌아와 밤9시경 자진 해산했다. 밤10시경 부산헌병대는 각 경찰서에 긴급지령을 내려 시위학생들을 검가하기 시작했다. 200여 명이 검거되었고 주모자로 지목된 15명의 학생은 구속, 송청되었다. 조사 결과 동래중학교 학생 9명, 부산제2상업학교 학생 6명이 기소되어 그중 12명이 징역 8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부산제2상업학교에서는 퇴학 12명, 정학 10명, 견책 12명이었으며, 동래중학교에서는 퇴학 8명, 정학 34명이었다. 이도윤은 대구형무소에서 8개월간 복역했다. 지독한 고문과 옥중생활의 여독으로 출옥 후 2주일 만에 순국한 사람도 있었다. 김선갑(부산제2상업학교)과 김명수(동래중학교)가 그들이다. 형무소에서 갖은 고문에 시달린 이도윤은 출옥 후에도 그 후유증 때문에 많은 고생을 했다. 게다가 요시찰인이라는 딱지가 붙어 항상 일경들이 감시하는 바람에 취직도 결혼도 힘들어 만주로 떠났다. 해방 후 조국에 돌아온 이도윤은 고향인 기장에서 양계장을 하며 농사일을 하는 등 초야에 묻혀 살면서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 말년에는 건강 때문에 이를 정리하고 수영구 자택에서 요양하던 중 2013년 2월 25일 8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부산 최대의 학생항일학생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부산시는 2015년부터 11월 23일을 ‘부산학생할일의 날’로 제정하였다.

전철에 꽃핀 인류애. 의인 이수현

2001년 1월 26일 오후 7시 15분. 일본 아카몬카이 어학원에서 어학연수를 하며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귀가하던 이수현(당시 26세)은 도쿄 신주쿠 신오쿠보역에서 취객이 반대편 선로에 떨어진 것을 보았다. 이수현은 그를 구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선로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술 취한 성인을 들어 옮기기에는 7초라는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때마침 선로로 들어오는 열차는 멈추지 않았고, 같이 구조하던 일본인 사진작가 세키네 시로(47세)씨와 이수현 씨는 취객 사카모토 세이코(37세)와 함께 목숨을 잃고 말았다. 개인주의가 팽배하던 일본 사회는 한 외국인 젋은이의 행동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수현(1974~2001)은 이성대 씨의 장남으로 울산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사고 당시 그는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9동 3번지 동서그린 가동에 주소를 둔 대학생이었다. 부산 낙민초등학교 동래중학교 내성고등학교를 거쳐, 1993년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당시 서창캠퍼스) 무역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재학 중 일본어 공부를 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을 올바르게 이해하여 한일 교역에 이바지하고 싶은 마음으로 대학을 휴학하고 2000년 1월 일본 아카몬카이 일본어학교에 입학하여 유학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일어난 일이었다.

그의 부모님과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은 2002년 1월 기탁된 1억 원과 한일 양국 국민이 보내온 성금으로 LSH아시아장학회를 조직하여 아카몽카이 일본어학교에서 공부하는 한국인 및 동남아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이외에도 고려대학교 이수현 장학금, 내성고등학교 이수현 장학금이 있다. 2001년 5월 24일 부산광역시와 부산광역시 교육청은 부산 어린이대공원 내 부산학생교육문화회관 앞뜰에 이수현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아들을 가슴에 묻고 힘든 나날을 보내던 이수현의 어머니 신윤찬 씨(68)는 아들의 추모비가 있는 부산 어린이대공원을 매일 찾다가 무료급식소를 알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어르신들에게 15년 넘게 식사 봉사를 하고 있다. 아버지 이성대 씨(81)는 아들을 추모하는 이들이 모은 성금을 장학재단에 기부하면서 700명이 넘는 학생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건장한 젊은이를 잃은 슬픔은 크지만, 그가 던진 교훈은 더욱 크다. 개인화되고 파편화되어가는 현대사회에서 자기를 던져 남을 구하고자 했던 그의 행동은 많은 사람의 가슴속에 인간애의 씨앗을 아로새겼다. 지금도 도쿄를 찾는 많은 사람이 일부러 신오쿠보역 그 자리를 방문한다고 한다. 26살 아름다운 청년이 떠난 자리에는 마음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전하는 꽃다발이 언제나 놓여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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